바덴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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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덴 대공국은 12세기 바덴 변경백국에서 기원하여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 대공국으로 확장된 독일의 옛 영토이다.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했으며,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영토를 확장했다. 1818년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했으나, 1848년 혁명과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헌법이 폐지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에 가입했으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리드리히 2세의 퇴위로 체링겐 가문의 통치가 종식되고 바덴 자유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바덴은 여러 단계를 거쳐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로 통합되었다. 바덴 대공국은 양원제 의회와 5개 부서로 구성된 행정부를 갖추었으며, 농업, 산업, 교통,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체링겐 가문이 통치한 바덴 대공국은 12세기 바덴 변경백국으로 시작하여 1771년 통일될 때까지 여러 작은 영토로 분열되었다. 1803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선제후의 지위로 격상되었고, 독일 제후국들의 병합을 통해 영토가 추가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후에는 대폭 확장된 바덴 대공국이 되었으며,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8]
바덴 대공국의 의회는 양원제였다. 상원은 성년이 된 대공가의 남자,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병합된 모든 제후 가문의 수장, 프라이부르크 대주교, 루터파 복음교회의 수장, 각 대학과 기술고등학교 대표, 4년 임기로 지방 귀족들 가운데 선출된 8명, 상공회의소에서 선출된 3명, 농업협회에서 선출된 2명, 무역협회에서 선출된 1명, 지역에서 선출된 시장 2명, 대공이 임명한 8명으로 이루어졌다.
2. 역사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바덴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에 대항했으나 패배했고, 카를 프리드리히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라인강 좌안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다. 1803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호의로 카를 프리드리히는 콘스탄츠 주교령 등 영토와 선제후 지위를 얻었다.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는 프랑스 편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희생하여 브라이스가우 등 영토를 획득했다. 1806년 라인 동맹 가입 후 대공으로 선언되고 추가 영토를 받았다.[8]
바덴은 프랑스를 지원하며 1809년 쇤브룬 조약으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희생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사후 그의 손자 카를이 계승했고, 나폴레옹 법전이 채택되어 1900년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카를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합류했다.[8]
1815년 독일 연방 가입 후, 빈 회의에서 상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1816년 뮌헨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바이에른 왕국 간 영토 분쟁이 해결되었고, 체링겐 가문 멸족 시 바이에른의 상속권이 재확인되었다. 1817년 대공 카를은 정략 결혼으로 태어난 호흐베르크 백작들의 왕위 계승을 허용했고, 1819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호흐베르크 측에 유리하게 결정되었다.[8]
1818년 대공 카를은 자유주의적 헌법을 부여하여 두 의회를 구성하고 입법, 과세 동의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프랑스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의회가 국민 공회를 모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1819년 칼스바트 칙령 전 의회 정회, 1823년 의회 해산 및 세금 징수로 헌법은 효력을 잃었다.[8]
1830년 레오폴트 즉위 후 7월 혁명은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자유주의적 개혁이 도입되었다. 1832년 프로이센 관세 동맹 가입은 국가 번영에 기여했다.[8]
1847년 급진주의가 다시 대두되었고, 오펜부르크 대중 시위에서 민병대 전환, 누진 소득세, 자본과 노동 이익 조정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848년 2월 파리 혁명 소식은 동요를 일으켰고, 오펜부르크 프로그램 채택, 정부 개편, 통일 독일 의회 설립 투표가 이루어졌다.[8]
공화주의 선동가들의 무질서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으나 진압되었다. 프리드리히 헤커 등의 봉기는 1848년 4월 칸데른에서 패배했고, 프라이부르크 함락, 프랑스-독일 "군단" 격파가 이어졌다. 1849년 초 헌법 문제로 더 큰 문제가 발생했고, 군사 반란으로 대공 레오폴트가 도망가고 로렌츠 브렌타노 주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바덴 대공은 프로이센에 무력 개입을 요청했고, 프로이센 육군은 1849년 6월 바덴을 침공, 구스타프 슈트루베 등 반군은 패배했다. 체포된 반군 지도자들은 처형되었고, 프로이센군이 바덴을 점령했다. 8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주, 미국 남북 전쟁에 참전했다.[8]
레오폴트 복귀 후 의회 해산, 새 내각 강화 법률 통과가 이루어졌다.[8]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지만, 베르바흐 전투 전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했다.[8]
바덴은 1866년 북독일 연방 가입이 불가피해졌고, 바덴 군대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리드리히 대공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 왕을 독일 제국 황제로 처음 환호했다.[8]
바덴 내부 정치는 종교 문제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59년 교황청 정교 협약으로 교육 성직자 감독, 종교 단체 설립 용이화로 헌법 갈등이 발생, 1863년 세속주의 승리로 끝났지만 갈등은 계속되었다. 1867년 율리우스 폰 욜리 수상 취임 후 각료의 책임, 언론의 자유, 의무 교육 등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869년 시민 결혼 제도 도입 후 교황 무류성 교리 선포로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문화 투쟁이 격화되었고, 1880년 욜리 내각 몰락 후 로마와 화해, 1882년 프라이부르크 대교구 대주교 자리가 채워졌다.[8]
1918년 11월 혁명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퇴위, 체링겐 가문 통치가 종식되었다. 1918년 1월 만하임 노동자 파업, 11월 병사 평의회 결성, 임시 정부 구성, 안톤 가이스 임시 정부 주도가 이루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통치권을 포기하고 퇴위, 바덴 자유 인민 공화국이 결성되었다.
2. 1. 기원과 형성
체링겐 가문이 통치하는 대공국이었다. 바덴은 12세기에 바덴 변경백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1771년에 통일되기까지 다양한 작은 영토로 분열되었다. 1803년, 바덴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선제후의 지위로 격상되었으며, 독일 제후국들의 병합을 통해 교회 및 세속 영토가 추가되었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바덴은 대폭 확장된 바덴 대공국이 되었다. 1815년에는 독일 연방에 가입했다.
2. 2.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바덴은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 제1 공화국에 대항했다. 이 분쟁으로 변경백국의 시골 지역은 황폐해졌다. 바덴은 1796년에 패배했고,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는 배상금을 지불하고 라인강 좌안의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해야 했다. 1803년, 주로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호의에 힘입어 카를 프리드리히는 콘스탄츠 주교령, 라인 팔츠의 일부, 그리고 다른 작은 지역들을 얻었으며, 선제후의 지위도 받았다. 이후 바덴은 1805년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에 합류하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했다. 프랑스와 그 동맹국들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같은 해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통해 바덴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희생하여 브라이스가우와 오스트리아령의 다른 지역들을 획득했다. 1806년, 카를 프리드리히는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스스로 주권 군주이자 대공임을 선언했으며, 추가 영토를 받았다.[8]
바덴은 계속해서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1809년 쇤브룬 조약에 의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을 희생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보상을 받았다. 바덴의 영토를 4배로 늘린 카를 프리드리히는 1811년 6월에 사망했고, 그의 손자 카를이 뒤를 이었다. 카를은 프랑스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사촌이자 나폴레옹의 양딸인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8]
1810년 나폴레옹 법전이 채택되었으며, 1900년 ''독일 민법전''이 채택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카를은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까지 장인인 나폴레옹을 위해 싸웠고, 이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합류했다.[8]
2. 3. 독일 연방 시기 (1815년 - 1866년)
1815년 바덴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8] 그러나 빈 회의에서 대공국의 상속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8] 1816년 뮌헨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과 바이에른 왕국 간의 영토 분쟁이 해결되었고, 체링겐 가문이 멸족될 경우 바덴 전체에 대한 바이에른의 상속권이 재확인되었다.[8] 이에 1817년 대공 카를은 정략 결혼으로 태어난 호흐베르크 백작들의 왕위 계승을 허용하는 사전 승인을 발표했다.[8] 바이에른과 바덴 사이의 논쟁은 181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바덴과 4대 강대국이 서명한 조약을 통해 호흐베르크 측에 유리하게 결정되었다.[8]
이 분쟁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1818년 대공 카를은 대공국에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부여했는데, 이 헌법에 따라 두 개의 의회가 구성되었고 입법과 과세에 대한 동의가 필요했다.[8] 그러나 혁명 기간 동안 국민들은 프랑스 사상의 영향에 휩싸였고, 의회는 프랑스 혁명 초기의 국민 공회를 모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8] 1818년에 즉위한 루이 1세는 인기가 없었고, 행정은 비효율적인 관료들의 손에 있었다.[8]
1819년 칼스바트 칙령이 공포되기 전, 대공은 의회를 정회했다.[8] 1823년에는 의회가 군 예산안 투표를 거부하자 대공이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세금을 징수했다.[8] 1825년 1월, 정부의 압력으로 자유주의자 3명만이 의회에 복귀했고, 예산안을 3년에 한 번만 제출하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어 헌법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8]
1830년 루이 대공은 이복 동생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8] 7월 혁명은 바덴에서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레오폴트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다.[8] 1830년 선거는 자유주의 다수의 복귀를 가져왔고, 이후 몇 년 동안 헌법, 형사 및 민사법, 교육 분야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이 도입되었다.[8] 1832년 바덴이 프로이센의 ''관세 동맹''에 가입한 것은 국가의 물질적 번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8]
1847년, 급진주의가 다시 바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8] 1847년 9월 12일, 오펜부르크에서 열린 대중 시위는 정규군을 헌법에 서약할 국가 민병대로 전환하고, 누진 소득세를 부과하며, 자본과 노동의 이익을 공정하게 조정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8]
1848년 2월 파리 혁명 소식은 동요를 최고조로 이끌었다.[8] 수많은 대중 집회가 열렸고 오펜부르크 프로그램이 채택되었다.[8] 1848년 3월 4일, 하원은 이 프로그램을 거의 만장일치로 수용했다.[8] 다른 독일 국가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사면을 선포하고 개혁을 약속했다.[8] 내각은 보다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편되었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연방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통일된 독일을 위한 의회 설립에 투표할 권한을 부여했다.[8]
그러나 공화주의 선동가들이 조장한 무질서는 계속되었다. 연방군을 동원하여 선동가를 진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무장 봉기로 이어졌고, 이는 큰 어려움 없이 진압되었다.[8] 프리드리히 헤커와 프란츠 요제프 트레프츠거가 이끈 봉기는 1848년 4월 20일 칸데른에서 패배했다.[8] 프라이부르크는 4월 24일에 함락되었고, 4월 27일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바덴을 침공한 프랑스-독일 "군단"이 도센바흐에서 격파되었다.[8]
1849년 초,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결의안에 따른 새로운 헌법 문제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8] 1849년 2월 10일에 제헌 의회 소집 제안에 동의하지 않은 하원의 거부는 급진주의자들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했다.[8]
새롭게 발발한 봉기는 첫 번째 사건보다 더 강력했다. 5월 11일 라스타트에서 일어난 군사적 반란은 군대가 혁명에 동조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5월 13일 카를스루에에서의 반란으로 바덴 대공 레오폴트가 도망가야 했다.[8] 로렌츠 브렌타노가 이끄는 의회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을 기다리는 동안 사건을 지휘했다.[8]
6월 1일 임시정부가 완료되었고, 6월 10일 "제헌 의회"가 소집되었다.[8] 바덴 대공은 프로이센의 무력 개입을 요청했고, 베를린은 바덴이 세 왕의 동맹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이를 승인했다.[8]
프로이센 육군은 빌헬름 왕자(후에 독일 제국 빌헬름 1세)의 지휘하에 1849년 6월 중순 바덴을 침공했다.[8] 구스타프 슈트루베와 그의 추종자들은 루드비히 미에로슬라프스키를 지도자로 세웠다. 미에로슬라프스키는 1849년 6월 20일 바그호이젤에서 프로이센군과 마주했고 패배했다.[8] 6월 25일, 빌헬름 왕자가 카를스루에에 입성했고, 그 달 말 임시 정부 위원들은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했다.[8] 체포된 반군 지도자들, 특히 전직 장교들은 군사 처형을 당했다.[8] 군대는 프로이센 수비대 도시에 분산되었고, 프로이센군은 한동안 바덴을 점령했다.[8] 프란츠 트레프츠거는 스위스로 탈출했다.[8]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바덴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4] 이들 중 다수는 미국 남북 전쟁에 폐지론자이자 연방군으로 참전했다.[5]
바덴 대공 레오폴트는 8월 10일에 돌아와 의회를 해산했다. 그 다음 선거는 새로운 내각에 유리한 다수를 가져왔고, 정부를 강화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8]
2. 4. 독일 제국 시기 (1871년 - 1918년)
프리드리히 1세 대공은 처음에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반대했지만,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대한 프로이센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굴복해야 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바덴은 오스트리아 편에 섰지만, 베르바흐 전투 이틀 전인 7월 24일, 제2의회는 대공에게 전쟁을 종식하고 프로이센과 동맹을 체결할 것을 청원했다.[8]
바덴은 독일 연방에서 탈퇴하고 1866년 8월 17일 프로이센과 평화 및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비스마르크는 바덴의 북독일 연방 가입을 반대했지만, 남부 독일 연방 형성에 대한 바덴의 반대로 인해 통합은 불가피해졌다. 바덴 군대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독일 제후들의 회의에서 프로이센 왕을 독일 제국 황제로 처음 환호한 사람이 바로 바덴의 프리드리히 대공이었다.[8]
바덴의 내부 정치는 1870년 전후 종교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59년 6월 28일 교황청과의 정교 협약으로 인해 교육을 성직자의 감독 하에 두고 종교 단체 설립을 용이하게 하자 헌법적 갈등이 발생했다. 이 갈등은 1863년 세속주의 원칙의 승리로 끝났지만, 세속주의와 가톨릭교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867년 율리우스 폰 욜리가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각료의 책임, 언론의 자유, 의무 교육 등 여러 세속적 방향의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869년 시민 결혼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1870년 교황 무류성 교리가 선포된 후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바덴에서는 독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문화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정부는 구 가톨릭 공동체의 형성을 장려했다. 1880년 욜리 내각이 몰락한 후에야 바덴은 로마와 화해했고, 1882년 프라이부르크 대교구 대주교 자리가 다시 채워졌다.[8]
2. 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11월 혁명의 여파로 프리드리히 2세는 1918년 11월 22일에 퇴위했다.[6] 이는 체링겐 가문의 600년 통치를 종식시키는 사건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퇴위한 마지막 독일 군주 중 한 명이었다.
1918년 1월, 만하임의 산업 노동자 22,000명이 파업을 벌였다. 1918년 11월 8일, 라와 오펜부르크 주둔군 소속 병사들은 병사 평의회를 결성했다. 킬에서 돌아온 제171 예비대대의 한 구성원인 빌헬름 엥겔베르트 외페링이 시위를 시작했다. 11월 9일에는 만하임에서 또 다른 병사 평의회가 결성되었다.
자유국민당, 중앙당, 그리고 진보당(FVP)은 만하임에서 폭력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11월 9일 하인리히 보트만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같은 날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퇴위했고, 만하임과 카를스루에의 시장들은 복지 위원회를 구성했다. 11월 10일, 카를스루에 복지 위원회와 소비에트는 보트만의 인정을 받아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임시 정부는 5명의 사민당 구성원, 2명의 독립 사회민주당, 2명의 중앙당원, 2명의 자유국민당원으로 구성되었다. 바덴의 사민당 의장이자 란트타크 부의장인 안톤 가이스가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6]
11월 10일부터 14일까지 병사 평의회는 정부에 공화국 선포와 프리드리히 2세의 해임을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정부를 위헌이라고 불렀지만, 이에 반박하지 않고 각료들을 해임했다. 그는 11월 13일 자신의 통치권을 포기했고, 11월 22일 퇴위했다. 바덴 자유 인민 공화국이 11월 14일에 결성되었고, 1919년 1월 5일에 선거가 예정되었다.
3. 정치
하원은 선거로 뽑힌 7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24명은 도시에서, 49명은 농촌에서 선출되었다. 수형자(受刑者)거나 빈민이 아닌 25세 이상의 남자는 선거권이 있었으나, 간접선거였다. 유권자들은 선거인단(Wahlmänner)을 뽑고, 이들이 의원을 선출하였다. 하원의 임기는 4년이었고, 2년마다 절반을 개선(改選)했다.
대공국의 행정부로는 내무, 외무·궁내부, 재무, 법무, 그리고 종무(宗務)·교육부 등 5개 부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군정은 옛 대공국의 남쪽 절반을 가지고 바덴주(처음에는 남부 바덴으로 불림)를 만들었고, 수도는 프라이부르크였다. 이 지역은 1947년 헌법에서 대공국의 진정한 계승자로 선언되었다. 북쪽 절반은 북부 뷔르템베르크와 합쳐져 미국 점령 지역의 일부가 되었고, 뷔르템베르크-바덴주를 형성했다. 바덴과 뷔르템베르크-바덴은 모두 1949년 서독의 주가 되었지만, 1952년에는 서로 합병되었고, 남부 뷔르템베르크와 옛 프로이센의 월경지였던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과 합쳐져 바덴-뷔르템베르크를 형성했다. 이는 독일 연방 공화국 역사상 유일하게 주가 합병된 사례로 남아있다.
3. 1. 헌법 및 의회
1814년 8월 22일에 채택된 헌법은 바덴 대공국이 끝날 때까지 약간의 변경을 거쳐 유지되었다. 바덴 대공국은 대공에게 행정 권한이 있는 세습 군주제였으며, 입법 권한은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된 대표 의회(란트타크)와 대공이 공유했다.[8]
의회는 양원제였다. 상원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8]
구성원 |
---|
성년이 된 대공가의 남자 |
나폴레옹 전쟁 당시 병합된 모든 제후 가문의 수장 |
프라이부르크 대주교 |
바덴 개신교 복음주의 교회 의장 |
각 대학과 기술고등학교 대표 1명 |
4년 임기로 지방 귀족들 가운데 선출된 8명 |
상공 회의소에서 선출된 3명 |
농업 회의소에서 선출된 2명 |
상업에서 선출된 1명 |
지방 자치 단체의 시장 2명 |
대공이 임명한 8명 (그 중 2명은 법률가) |
하원은 선거로 뽑힌 73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 중 24명은 도시에서, 49명은 농촌에서 선출되었다. 수형자(受刑者)거나 빈민이 아닌 25세 이상의 남자는 선거권이 있었으나, 간접선거였다. 유권자들은 선거인단(Wahlmänner)을 뽑고, 이들이 의원을 선출하였다. 하원의 임기는 4년이었고, 2년마다 절반을 개선(改選)했다.[8]
양원은 최소 2년에 한 번씩 회의를 가졌다.[8]
대공국의 행정부는 내무, 외무·궁내부, 재무, 법무, 그리고 종무(宗務)·교육부 등 5개 부서로 구성되었다.[8]
3. 2. 역대 군주 (바덴 대공)
체링겐 가문이 통치한 바덴 대공국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재위 기간 | 이름 | 출생-사망 |
---|---|---|
1806년 - 1811년 | 카를 프리드리히 | 1728년-1811년 |
1811년 - 1818년 | 카를 | 1786년-1818년 |
1818년 - 1830년 | 루트비히 1세 | 1763년-1830년 |
1830년 - 1852년 | 레오폴트 | 1790년-1852년 |
1852년 - 1858년 | 루트비히 2세 | 1824년-1858년 |
1856년 - 1907년 | 프리드리히 1세 | 1826년-1907년 |
1907년 - 1918년 | 프리드리히 2세 | 1857년-1928년 |
프리드리히 1세는 1852년부터 섭정을 하였으며, 1856년부터 대공 칭호를 사용하였다.
3. 3. 바덴 대공가 수장 (1918년 이후)
재임 기간 | 이름 | 비고 |
---|---|---|
1918년 - 1928년 | 프리드리히 2세 | |
1928년 - 1929년 | 막시밀리안 폰 바덴 | 독일 제국 최후의 수상 |
1929년 - 1963년 | 베르톨트 | |
1963년 - 2022년 | 막시밀리안 | |
2022년 - 현재 | 베른하르트 |
3. 4. 훈장
바덴 대공국의 훈장은 다음과 같다.훈장 | 등급 |
---|---|
베르톨트 1세 훈장 | 4등급 (Grand Cross, 1등급 Commander, 2등급 Commander, Knight) |
체링거 사자 훈장 | 5등급 (Grand Cross, 1등급 Commander, 2등급 Commander, 1등급 Knight, 2등급 Knight) |
대공가 충성훈장 | 3등급 (Grand Cross, Commander, Princess cross) |
4. 지리
바덴 대공국의 면적은 15081km2였으며,[7] 비옥한 라인강 계곡 동쪽 절반과 그 경계를 이루는 산악 지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8]
산악 지대가 훨씬 더 넓어 전체 면적의 거의 80%를 차지했다. 남쪽의 보덴 호수에서 북쪽의 네카어 강까지는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de)의 일부로, 킨치히 계곡에 의해 고도가 다른 두 지역으로 나뉜다. 킨치히 남쪽의 평균 높이는 945m이며, 가장 높은 봉우리인 펠트베르크는 약 1493m에 달하는 반면, 북쪽의 평균 높이는 640m에 불과하며, 전체의 최고점인 호르니스그린데는 1164m를 넘지 않는다. 네카어 강 북쪽에는 오덴발트 산맥이 있으며 평균 439m이고, 카첸부켈은 최고 603m이다. 라인강과 드라이잠 사이에 위치한 카이저슈툴은 길이가 거의 16 km, 너비가 8 km인 독립적인 화산 그룹으로, 최고점은 536m이다.[8]
바덴의 대부분은 라인강 유역에 속하며, 고지대에서 20개 이상의 지류를 받는다. 영토의 북동부 지역은 또한 마인 강과 네카어 강에 의해 물이 공급된다. 그러나 슈바르츠발트 동쪽 경사면의 일부는 도나우 강 유역에 속하며, 이곳에서 여러 산간 계류에서 발원한다. 대공국에 속했던 수많은 호수 중에는 뭄멜제, 빌더제, 아이헤너제 및 슐루흐제가 있지만, 그 어떤 호수도 규모가 크지 않다. 보덴 호수(''Bodensee'')는 바덴-뷔르템베르크 및 바이에른의 독일 연방주(''Länder'')의 일부와 오스트리아 및 스위스의 일부에 속한다.[8]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바덴은 더위와 추위의 큰 편차를 보인다. 라인강 계곡은 독일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이지만, 슈바르츠발트의 고지대에서는 남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추위를 기록한다. 라인강 계곡의 평균 기온은 약 10°C이고, 고지 고원의 평균 기온은 6°C이다. 7월이 가장 더운 달이고 1월이 가장 추운 달이다.[8]
바덴의 광물 자원은 풍부하지 않았지만, 우수한 품질의 철, 석탄, 납 및 아연이 생산되었고, 소량의 은, 구리, 금, 코발트, 비트리올 및 황이 생산되었다. 이탄이 풍부하게 발견되었고, 석고, 도자기 점토, 도기 점토 및 소금도 발견되었다. 바덴의 광천수는 여전히 매우 많으며 큰 명성을 얻었으며, 바덴바덴, 바덴바일러, 안토가스트, 그리스바흐, 프리어스바흐 및 페터탈의 광천수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8]
계곡에서는 토양이 특히 비옥하여 밀, 옥수수, 보리, 스펠트, 호밀, 콩, 감자, 아마, 삼, 홉, 사탕무 및 담배가 풍성하게 수확되며, 산악 지역에서도 호밀, 밀 및 귀리가 널리 재배된다. 목초지가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 양, 돼지 및 염소의 사육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사냥감으로는 사슴, 멧돼지, 산누에 및 야생 자고새가 상당히 풍부하며, 산간 계류에서는 양질의 송어가 잡힌다. 포도 재배가 증가하고 있으며, 와인은 계속해서 잘 팔리고 있다. 바덴 와인 지역은 독일에서 포도원 면적이 세 번째로 큰 지역이다. 정원과 과수원에서는 과일, 특히 체리, 자두, 사과 및 호두가 풍성하게 생산되며, 양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바덴은 다른 남부 독일 국가보다 숲이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숲에서는 유럽 너도밤나무와 은색 전나무가 주를 이루지만, 밤나무, 스코틀랜드 소나무, 노르웨이 가문비나무 및 이국적인 미국 원산 더글러스 전나무 등도 잘 분포되어 있다. 연간 목재 생산량의 적어도 3분의 1이 수출된다.[8]
5. 경제
1870년 이전 바덴 대공국의 부는 대부분 농업 부문에서 창출되었으나, 이후 산업 생산이 이를 대체하였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기계, 모직 및 면 제품, 실크 리본, 종이, 담배, 도자기, 가죽, 유리, 시계, 보석, 화학 제품 등이 있었다. 사탕무 설탕 또한 대규모로 제조되었으며, 나무로 만든 목각 장식, 장난감, 오르골, 오르간도 생산되었다.[8]
바덴의 수출 품목은 주로 위에서 언급된 상품들이었으며, 그 규모는 상당했지만 대부분 통과 무역으로 이루어졌다. 만하임은 라인강을 따라 수출하는 주요 시장 중심지였으며, 상당한 강 운송량을 보였다. 또한 만하임은 대공국의 주요 제조 도시이자 북부 지역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8]
5. 1. 산업
1910년경, 바덴 대공국 지역 토지 면적의 56.8%가 경작되었고 38%가 산림이었다. 1870년 이전에는 농업 부문이 대공국 부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후 산업 생산이 이를 대체하였다. 주요 생산품은 기계, 모직 및 면 제품, 실크 리본, 종이, 담배, 도자기, 가죽, 유리, 시계, 보석, 화학 제품이었다. 사탕무 설탕도 대규모로 제조되었으며, 나무로 만든 목각 장식과 장난감, 오르골, 오르간도 생산되었다.[8]바덴의 수출은 주로 위 상품들로 구성되었고 상당했지만, 무역의 대부분은 통과 무역으로 이루어졌다. 대공국은 많은 철도와 도로를 갖추고 있었으며,[8] 라인강을 통해 선박으로 상품을 운송했다. 철도는 바덴 대공국 국립 철도(Großherzoglich Badische Staatseisenbahnen)로 운영되었다. 철도 노선은 주로 라인강과 평행하게 뻗어 있었고, 동서 방향으로 사선 지선이 있었다.
만하임은 라인강을 따라 수출하는 주요 시장 중심지였으며 상당한 강 운송량을 보였다. 또한 대공국의 주요 제조 도시이자 북부 지역의 중요한 행정 중심지였다.[8]
5. 2. 교통
바덴 대공국은 철도와 도로가 잘 갖춰져 있었으며,[8] 라인강을 통해 선박으로 상품을 운송했다. 철도는 바덴 대공국 국립 철도가 운영했으며, 철도 노선은 주로 라인강과 평행하게 뻗어 있었고, 동서 방향으로 사선 지선이 있었다.만하임은 라인강을 따라 수출하는 주요 시장 중심지였으며, 강 운송량이 상당했다.[8]
6. 사회
바덴 대공국은 19세기 초 변경백국에서 20세기 초 면적 15082km2, 인구 201만 728명[7]의 대공국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초 바덴의 면적은 3400km2, 인구는 21만 명이었다.
주민의 61%는 로마 가톨릭 신자, 37%는 개신교 신자, 1.5%는 유대교 신자였다.[7] 인구 절반가량은 농촌에 살았고, 나머지 지역의 인구 밀도는 약 330/km2였다.[8]
바덴 주민은 알레만니, 프랑크족 등 다양한 기원을 갖는다. 무르 강 남쪽은 알레만니계, 북쪽은 프랑크계 주민들이 주로 거주했다. 슈바벤 고원은 뷔르템베르크에 살던 슈바벤족의 이름을 땄다.[8]
6. 1. 인구
19세기 초, 바덴은 변경백국이었으며, 면적은 3400km2가 조금 넘었고, 인구는 21만 명이었다. 이후, 대공국은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여 1905년에는 15082km2[7]와 201만 728명[7]의 인구를 갖게 되었다. 이 중 61%가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37%가 개신교 신자, 1.5%가 유대교 신자였으며, 나머지는 다른 종교를 믿었다. 당시 인구의 약 절반이 2,000명 미만의 공동체에 거주하는 농촌 지역에 살았으며, 나머지 지역의 인구 밀도는 약 330/km2였다.[8]국가는 다음과 같은 구역으로 나뉘었다.[8]
공국의 수도는 카를스루에였으며, 위에 열거된 도시 외에 중요한 도시로는 라슈타트, 바덴바덴, 브루흐잘, 라어 및 오펜부르크가 있었다. 인구는 북부와 스위스 도시 바젤 근처에 가장 밀집되어 있었다. 바덴 주민들은 다양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무르 남쪽의 주민들은 알레만니의 후손이고 북쪽은 프랑크족의 후손이며, 슈바벤 고원은 인접한 독일 부족 (슈바벤)[8]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이들은 뷔르템베르크에 살았다.
6. 2. 교육
바덴에는 수많은 교육 기관이 있었다. 하이델베르크에는 개신교 대학교가, 프라이부르크 임 브리스가우에는 로마 가톨릭 대학교가 있었으며, 카를스루에에는 연구 중심 대학교가 있었다.[8]참조
[1]
백과사전
Baden
https://www.britanni[...]
2008-04-26
[2]
서적
The Lives of Hans Luther, 1879 - 1962: German Chancellor, Reichsbank President, and Hitler's Ambassador
Lexington Books
[3]
웹사이트
The Salmen – a monument of national significance
https://www.offenbur[...]
[4]
서적
The Pursuit of Power
Penguin Books
[5]
서적
The Forty-Eighters: Political Refugees of the German Revolution of 1848
Columbia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Novemberrevolution im Südwesten
https://www.lpb-bw.d[...]
[7]
백과사전
Baden
http://www.newadvent[...]
2008-11-07
[8]
백과사전
Baden, Grand Duchy of
[9]
서적
Revolution im deutschen Südwesten: das Großherzogtum Baden 1848/49
Kohlhammer
1998
[10]
문서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있던 국가
[11]
문서
1863년 이후 안할트에 합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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